설교 제목: 조엘 비키 박사 참된 신자의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주일, 제1문 상반절)
조엘 비키 박사 참된 신자의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주일, 제1문 상반절)
시편 찬송: 416:1, 7 성경 봉독: 이사야 40:1-15 시편 찬송: 398 시편 찬송: 159:1, 2 시편 찬송: 202
본문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사랑하는 회중 여러분,
우리는 오늘 다시 한번 저명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공부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요리문답(Catechism)’이라는 단어는 원래 ‘다시 울려 퍼지다’ 혹은 ‘메아리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리문답 교육은 질문을 통해 가르치고,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거나 메아리치듯 응답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질문과 답변은 가르침을 위한 매우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성경의 위대한 진리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배열하고, 질문과 답변 형식을 통해 회중에게 그 진리들을 주제별로 설교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판단했습니다.
요리문답 설교는 본문 설교(textual preaching)와는 다릅니다. 본문 설교 또한 강해적이지만, 성경의 특정 한 본문에 집중하여 그 말씀을 풀어냅니다. 반면, 성격상 주제별인 요리문답 설교는 특정 주제나 사안을 택하여 성경이 그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지 다룹니다. 따라서 요리문답 설교는 본문 설교보다 결코 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요리문답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직접 가져온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설교가 성경 본문 하나에 직접 기초하지 않으면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최근 발행된 우리 시편가(Psalter) 판본에서 각 ‘주일(Lord’s Day)’ 아래에 성경 구절들을 상세히 기록해 둔 이유 중 하나는, 각 주일의 내용이 얼마나 철저히 성경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요리문답은 성경과 동등하지 않으며, 성경 위에 있지도 않습니다. 요리문답은 성경에 복속됩니다. 하지만 그 진리들은 수 세기 동안 검증되었으며, 언제나 성경적이고 유익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원래 요리문답이 작성되었을 때, 그것은 청소년들과 아이들이 암기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나중에 일부 답변이 암기하기에 다소 길고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고, 요리문답을 단순화한 형태인 ‘요약서(Compendium)’를 승인했습니다. ‘콤펜디움’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단축된 형태’를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신앙 고백을 준비하는 청소년들을 가르칠 때 이 요약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경에 철저히 기초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6세기 후반부터 온 회중에게 성경의 개혁주의 진리를 가르치는 효과적인 교육 도구로 점점 더 널리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1618-1619년에 열린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에서는 교회들 안에서 효과적임이 증명된 요리문답 설교를 정기적으로 행하는 좋은 관습을 비준하고 강제했습니다. 도르트 교회 질서(Church Order of Dort)는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매 주일 한 차례 요리문답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요리문답 교육이 사라진 개혁 교회들에서는 자연스럽게 은혜의 교리에 대한 무지가 증가했습니다. 회중 여러분, 그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요리문답이 우리를 강권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모든 주요 교리에 대해 1~2년 안에 설교할 수 있는 규율을 갖춘 목회자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요리문답은 모든 주요 교리가 설명되도록 보장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경륜(whole counsel of God)을 교육받게 하는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아름다움은 우리 교사들이 이를 차갑거나 추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매우 개인적인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전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이 당신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우리 교사들은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역사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앙의 위대한 성경적 교리들을 우리의 마음과 삶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제1주일의 첫 번째 질문에 근거한 도입부 언급들을 통해 그 일면을 이미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첫 번째 질문과 답변의 앞부분만을 고려하는 것으로 제한하겠습니다.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첫 부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이 귀한 답변의 나머지 부분은 향후 설교에서 다루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음 주제 곁에서 잠시 머물고자 합니다.
참된 신자의 위로
우리는 이 위로를 다음과 같이 고찰할 것입니다:
-
개인적으로 (Personally)
-
역사적으로 (Historically)
-
체험적으로 (Experientially)
다시 반복합니다. 참된 신자의 위로: 개인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체험적으로.
I. 개인적으로
우리 요리문답은 또 다른 유명한 개혁주의 요리문답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소요리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즉, 최고의 목표)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하나님보다 인간의 위로에 대한 필요로 시작하기 때문에, 더 하나님 중심적으로 시작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보다 열등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인간으로 시작하는("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열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반대에 대해 무엇이라 답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미 제3주일에서 우리 교사들이 인간의 최고의 목표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고 답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첫 질문이 인간으로 시작한다고 해서 요리문답 전체가 인간 중심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이 요리문답은, 우리가 앞으로 계속 보게 되겠지만, 매우 하나님 중심적인 문서입니다. 이 요리문답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의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들의 모든 감정과 경험을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집중하도록 인도합니다.
하지만 반 레넨(Van Reenen) 목사가 말했듯이, 요리문답은 시작 부분에서 경주가 끝나는 지점에 보상을 매달아 두기를 원합니다. 이 보상은 참된 신자들의 분깃에 대한 관심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아직 회심하지 않은 자들의 식욕조차 자극할 수 있습니다. 오직 참된 신자들만이 이 세상의 수명뿐만 아니라 죽음과 무덤, 심지어 영원까지 아우를 수 있는 위로를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사들은 매우 지혜로운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보다 더 낫게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요리문답들은 단순히 시작하는 접근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어떤 접근 방식도 다른 쪽보다 더 또는 덜 하나님 중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두 접근 방식 모두 완전히 정당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모든 듣는 이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소년이나 소녀, 혹은 회심하지 않은 그 어떤 사람도 개인적인 ‘위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삶을 즐기고 싶어 하며, 편안한(comfortable)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이 첫 질문은 매우 중요하고, 매우 개인적이며, 매우 매력적인 질문입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그러나 이 질문이 우리 모두의 관심을 끄는 동시에, 자연인(natural man)에게는 이 질문 자체가 이미 무언가 방해되고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습니다. 사실 두 가지 불안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교사는 이 질문에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정말로 ‘단 하나’의 위로만이 있다는 사실을 매우 강력하게 암시합니다.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위로들(comforts)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당신의 그 작은 위로의 진주들을 내 앞에 다 펼쳐 놓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위로의 긴 목록을 만들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아내나 남편이 나의 위로이고, 자녀들도 그러하며, 나의 직업, 취미, 관심사, 그리고 이런저런 노력들이 나의 위로입니다"라고 말하도록 묻지 않습니다.
회중 여러분, 소년 소녀들, 그리고 청년 여러분, 그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세상을 지나는 동안, 그리고 죽음의 시간과 영원 속에서도 여러분을 위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위로, 그 한 가지 위로가 있습니까?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위로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값진 진주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까? 변치 않고 영원하며 모든 것을 포함하는 위로를 가지고 있습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회중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혼 사이에서 지금이라도 묻습니다. 여러분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단 하나의 위로, "이것은 죽음의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모든 세상 소유물처럼 이것을 뒤에 두고 떠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위로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유일한 위로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것들에 희망을 두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질문은 불안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시간이 오면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 사이에 틈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나의 위로들에 대해 말해 주겠소. 그리고 죽음의 시간에 필요할 위로들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얘기합시다"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분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회심하지 않은 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두 번째 요소는, 우리 교사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적 기초 위에서 그렇게 합니다. 지혜자는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살 때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너무나 짧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짧습니다. 삶은 죽음을 위한 준비이며, 영원을 위한 준비입니다. 아담 안에서의 깊은 타락 이후로 삶과 죽음은 함께 속해 있습니다. 다가올 위대한 영원 속에서 우리가 잘 되려면, 삶과 죽음 모두에 유효한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 요리문답의 제1문은 사실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유일한 ‘삶-죽음’의 위로, 즉 당신의 유일한 ‘시간-영원’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친구여, 이 두 가지—삶과 죽음, 시간과 영원—를 분리하려는 여러분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소년 소녀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은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늘 그러하듯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게 새 마음을 주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바르게 알고, 은혜로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해 줄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사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얻는 소유물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교육이나 직업, 심지어 나의 가족에게도 있지 않습니다. ‘내일이면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는 에피쿠로스 철학에도 있지 않습니다. 인간 중심적인 그 무엇에도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는 이미 하나님 중심적인 답변을 보여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나의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인간 중심적으로 들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나의 위로입니다. 나는 내 자신의 의를 잃어버리는 법을 배웠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했듯이 누구나 위로를 찾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소속감’ 또한 찾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속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인가의 일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는 아무리 자급자족하는 척하려 해도 우리가 스스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만드셨고, 따라서 우리는 어딘가에 속하기를 갈망합니다.
우리 교사는 우리를 죽음과 무덤 너머까지 데려갈 수 있는, 우리가 속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합니다. 회중 여러분, 이 소속감은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잘 되려면 이 소속감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 단체에 가입하거나, 기부금을 내거나, 세례를 받거나, 신앙 고백을 하거나, 성찬에 참여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오직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께 속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모든 의를 벗겨 내시고, 여러분을 불쌍한 죄인으로서 오직 주 예수님께만 모든 죄를 던지도록 인도하셔야 합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하며 말입니다. 거기서 죄인은 자신이 주의 발치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유죄이며 지옥에 마땅한 존재임을 경험합니다. 그때 주님은 목자가 양을 들어 올리듯 그를 들어 올리시고, 품에 안으시며, 인자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40:1-2).
진정한 소속됨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아들을 주시는 성부, 자신을 주시는 성자, 그리고 영혼 속에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고 죄인을 자신의 의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그분을 귀하게 여기게 하시며, 그 죄인에게 "그분은 나의 것이요, 나는 그분의 것이다.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라고 믿을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II. 역사적으로
역사적으로 이것은 모든 시대 교회의 위로였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메시아에게 속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교회의 살아있는 위로였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듯, 이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사탄과 맺고 있던 언약을 깨뜨리러 오셨을 때, 하나님은 덤불 뒤에 숨은 아담을 불러내셨습니다. 그분은 아담에게 죽음과 심판과 형벌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또한 약속된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아내를 돌아보며 "네 이름은 하와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어로 ‘하와’는 생명 혹은 살아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동산에서 쫓겨나기 전부터 이미 믿음으로 약속된 씨앗, 즉 메시아에게 속함으로 위로를 찾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의 마음에 그 믿음을 심어 주셨고, 그래서 그는 아내를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 살아있음! 거기에 위로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 소망이 있소."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 위로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야곱이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재더미 위에 앉아 있던 욥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무엇으로 위로를 받았습니까?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그리고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타인이 아닌 그분을 직접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위로였습니다. 신약 교회는 그 성취 안에서 이 위로를 누리며 삽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고난당하셨고, 죽으셨으며, 장사되셨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성부 오른편에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위로, 그 삶과 죽음의 위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은 교회사 전체를 통틀어 성도들의 위로였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위로이자 특징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수년 동안 그의 모든 서신 위쪽에 "오직 예수(JESUS ONLY)"라고 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위로였습니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강조되는 위로입니다. 우리 요리문답은 반복적으로 우리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때문에 ‘위로의 책’이라 불립니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배후에 있는 세 명의 주요 개척자들—팔라틴의 프리드리히 3세, 성곽 교회의 궁정 목사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 그리고 지혜 대학의 강사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의 위로이기도 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회중 여러분, 이 세 사람이 어떻게 이 첫 번째 질문을 개인적인 방식으로 작성했는지, 그리고 그들 자신이 어떻게 이 위로 속에서 살았는지 설명하는 시간을 잠시 갖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요리문답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리문답은 1563년,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44세의 나이로 독일 지역의 팔라틴 선제후가 된 젊은 군주 프리드리히의 제안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당시 정치적 위계질서에서 승진하면서도 자신이 가난하게 양육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팔라틴의 선제후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솔로몬처럼 하나님께 돌이켜 지혜를 간구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루터교인들과 칼빈주의자들이 성찬식에서의 예수님의 현존 교리를 두고 다투고 있었기에 자신이 맡은 임무가 종교적으로도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제후 직을 맡을 때 이 문제가 자신의 영지에서 전쟁터가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루터의 오른팔이었던 필립 멜란히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멜란히톤은 프리드리히가 선제후가 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있었습니다. 그는 멜란히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멜란히톤은 모든 일에 평화와 절제를 구하라고 조언하며, 그렇게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확고한 성경적, 교리적 입장을 신중하게 견지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멜란히톤은 프리드리히에게 "그러는 동안 여러 나라의 교회에서 배움이 깊고 경건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논쟁이 발생할 때 최선의 조언을 해 줄 수 있게 하십시오"라고 덧붙였습니다.
프리드리히는 그 조언을 따르기로 결심했고, 자신의 영지에서 합의될 수 있고 백성들을 위한 교육 도구가 될 수 있는 요리문답을 작성하기 위해 두 명의 지혜로운 신학자를 찾았습니다. 그는 먼저 유명한 개혁가 피터 마터(Peter Martyr)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피터 마터는 "나는 너무 늙었습니다. 대신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에게 가십시오. 그는 요리문답 작성에 은사를 가진 젊은이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어서 프리드리히는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의 도움도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28세의 우르시누스와 26세의 올레비아누스가 하이델베르크로 와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게 된 것입니다.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가 하이델베르크로 부름받았을 때 그는 겨우 23세였습니다. 그는 14세 때 회심했고 성령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존 칼빈, 테오도르 베자, 피터 마터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23세 생일에 올레비아누스는 첫 목회지로 부름받은 트레브(Trèves) 시에서 처음으로 설교했습니다. 4주 후, 지역 영사는 그가 그 지역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동요시킨다는 이유로 개혁주의 교리 설교를 중단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올레비아누스는 개혁주의 신앙 전파를 멈추기를 거부했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훈계를 받았지만 여전히 복종을 거부했습니다. 몇 주 후 그가 설교하고 있을 때, 대주교 요한이 기병대를 이끌고 와서 그와 다른 12명의 개혁주의 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해 투옥했습니다. 감옥에서 몇 달을 보낸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올레비아누스가 다시는 트레브에서 설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그를 석방하기 위해 지역 정부에 3,000 플로린을 지불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올레비아누스는 이에 동의하고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린 뒤 하이델베르크의 궁정 설교자이자 신학자로 왔습니다.
그러나 요리문답의 첫 번째 신학자이자 주 저자는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였습니다. 우르시누스는 내성적인 신학자로, 자신의 욕구보다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따라 프리드리히의 초청에 응해 하이델베르크로 왔습니다. 그가 십 대 시절 신학을 공부했던 스승 필립 멜란히톤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르시누스는 우리 아카데미에서 약 7년간 살았으며, 그의 건전한 학식과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경건함으로 우리 중 바른 감정을 가진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습니다." 우르시누스는 이미 십 대 때부터 경건함과 결합된 학문적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전체 소명이 개혁주의 신학을 연구하고 장려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르시누스는 요리문답 129개 문항 중 최소 99개 문항의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올레비아누스는 최종 교정을 도왔고, 아마도 사도신경에 관한 몇몇 문항들의 초안 작성을 도왔을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진과 프리드리히 자신도 중요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요리문답이 프리드리히와 하이델베르크 교수진에 의해 승인된 후, 프리드리히는 유럽 전역의 경건한 개혁주의 학자들을 하이델베르크로 초대했고, 1563년 1월 19일 그들 모두에 의해 승인되었습니다. 요리문답은 곧 모든 주요 유럽 언어와 대부분의 아시아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도 빠르게 존경을 얻었으며, 1618년에 이르러서는 예배 중에 교회를 교육해야 할 요리문답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요리문답은 심한 반대에도 부딪혔습니다. 요리문답을 따르는 이들 때문에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보헤미아, 헝가리, 폴란드, 이탈리아, 스페인의 토양에서 피가 흘렸기에 이 책은 ‘순교자의 요리문답’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도와 루터교도 모두 요리문답을 고수하는 칼빈주의자들을 박해했습니다. 한때는 요리문답을 작성하게 했다는 이유로 프리드리히 자신의 생명도 위태로웠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선제후가 되었을 때 멜란히톤이 작성한,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루터교 교리 표준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동의한다고 서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적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양쪽 모두에 동의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요리문답이 작성된 지 3년 후, 그들은 프리드리히에게 요리문답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Diet of Augsburg)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부인하기를 거절한다면 자신의 지위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로 떠나기 전 형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의회에서 내게 위험이 닥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 하늘 아버지 안에서 ‘편안한(comfortable)’ 소망(‘위로’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과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이 마지막 시대에 말뿐 아니라 행위와 진실함으로, 온 로마 제국과 독일 민족 앞에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고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도구로 삼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나를 복음의 지식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통치하고 계심을 믿으며, 설령 내 피를 흘려야 한다 하더라도 순교를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 영광에 대해 이 세상에서나 영원 속에서 그분께 충분히 감사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편지에서 삶과 죽음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듣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간의 심의 끝에 제국 의회의 부총리는 제국 법령에 따라 프리드리히 3세에 대한 다음과 같은 혐의를 공식적으로 선고했습니다. "황제 폐하(막시밀리안 황제)는 이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 요리문답을 사용하고 그의 영지에 칼빈주의라는 이단을 도입함으로써 팔라틴 지역에 종교적 혁신을 일으킨 것을 고발합니다. 나아가 황제는 이 모든 것을 즉시 폐지할 것을 명합니다. 칼빈주의 교사와 설교자들은 팔라틴에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특정 수도원들은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반환되어야 하며, 선제후 자신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협정을 준수하고 다시 신실한 루터교도임을 입증할 것을 약속해야 합니다. 만약 선제후가 이러한 요구 사항에 순응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이 제국의 평화에서 제외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들이 프리드리히가 면전에서 낭독되었고,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대표가 그를 지켜보며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황제를 향해 돌아서서 그 유명한 답변을 남겼습니다. "황제 폐하, 저는 이곳에 직접 오기 전부터 밝혀온 확신을 계속 견지합니다. 그것은 신앙과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 저는 오직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신 한 분 주님만을 인정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것이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그 구원의 문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구원을 저는 나의 주님이시요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분의 진리를 지키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나의 요리문답이 가르치는 바, 이것을 나는 고백하고 이것으로 나는 삽니다. 이 요리문답은 성경으로부터 온 풍성한 진리를 담고 있어서 인간에 의해 반박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나의 반박할 수 없는 신념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관해서라면,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뉘른베르크에서 선한 양심으로 그것에 서명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서명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제게 어떤 일이 닥치든, 저는 이것으로 저 자신을 위로합니다. 즉, 나의 주님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그분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우리가 이 땅에서 그분의 이름을 위해 잃는 것은 무엇이든 내세에서 백 배로 보상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과 함께 저는 황제 폐하의 자비로운 배려의 손에 저 자신을 맡깁니다."
역사가들은 프리드리히가 제후들 사이의 자기 자리로 돌아왔을 때 홀 안에 침묵이 가득했다고 전합니다. 깊은 감동이 전해졌습니다. 루터 시대 이후 누가 황제 앞에서 이토록 대담하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마침내 작센의 선제후가 프리드리히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하며 침묵이 깨졌습니다. "프리츠, 자네가 우리 모두보다 더 경건하군." 그 순간의 분위기를 감지한 황제는 감히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습니다. 의회는 해산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갈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왜 우리가 우리보다 더 낫고 더 경건한 선제후와 싸워야 하는가?"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승리했고 프리드리히는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영지 전체에서 요리문답을 가르치고 사용할 수 있는 허가까지 받았습니다. 잠언의 말씀이 다시 한번 성취된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프리드리히, 우르시누스, 그리고 올레비아누스에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들의 유일한 위로는 그들이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 세 사람 모두 요리문답 전체의 기초가 되는 이 도입 문구에 근거하여 살았고 죽었습니다.
세 사람 중 프리드리히가 61세의 나이로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리문답이 작성된 지 5년이 채 되지 않은 1567년 10월 26일, 죽음의 침상에 모인 이들에게 흔히 ‘경건한 프리드리히’라 불린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이제 기뻐하시는 대로 나를 부르실 것입니다. 나의 양심은 내가 온 마음으로 섬겨온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되고 행복하며 평안합니다. 나는 나의 모든 교회와 학교에서 사람들이 인간에게서 벗어나 오직 그리스도께로만 인도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비록 힘은 작았으나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교회를 돌보셨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늘에서 살아계시며 통치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내가 이 방에서 무릎 꿇고 그분께 자주 쏟아부었던 기도와 눈물이 열매 없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로 인해 이곳에 충분히 오래 머물렀습니다. 이제는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위로와 안식 속으로 거두어질 시간입니다." 프리드리히의 삶과 죽음에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것이다"라는 고백이 들리지 않습니까?
16년 후인 1583년, 우르시누스는 49세의 나이로 그의 삶과 유용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망인과 아들을 남기고 노이슈타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전 그는 영원을 위한 그의 토대가 무엇인지 질문받았습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첫 번째 답변의 정수인 대답을 남겼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그 복된 확신을 천 개의 세상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노이슈타트 개혁 교회의 그의 무덤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졌습니다. "여기 위대한 신학자,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오류를 이긴 승리자, 강력한 연설가이자 저술가, 날카로운 철학자, 지혜로운 자, 그리고 청소년들의 훌륭한 교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누워 있노라."
4년 후인 1587년, 올레비아누스는 헤르보른에서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의 침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확신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유명한 라틴어 한 단어로 답했습니다. "Certissimus(체르티시무스) — 가장 확실합니다." 올레비아누스의 죽음과 함께 요리문답의 마지막 개척자도 은혜로 영원한 복락에 들어갔습니다.
회중 여러분, 이제 이분들은 우리에게 유산, 즉 신앙과 위로의 개인적인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체험적인’ 유산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또한 진심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나의 것이 아니요,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생각을 나누기 전에 시편가 159편 1, 2절을 찬송하겠습니다.
III. 체험적으로 (Experientially)
우리 요리문답의 첫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루어진 이 고백에 대해 우리가 묵상해야 할 네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놀랍도록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고백입니다. 여기 인생의 모든 비결이 단 한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회복된 인생의 목적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에 유일하고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성취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이 한 문장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단순하고도 심오한 고백입니다.
둘째로, 이것은 또한 고통스러운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고통스럽다고요?"라고 물으실지 모릅니다. 예, 고통스럽습니다. 회중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는 데는 평생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요리문답의 역사를 들을 때 회심하지 않은 자들도 감동을 할 수 있고 프리드리히,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의 위대한 영웅주의를 찬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실제로 겪어내고, 거저 주시는 주권적인 은혜의 진리를 위해, 즉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 것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박해와 시련과 적대감이라는 고통뿐만 아니라 안으로부터 오는 고통도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마음은 우리 자신을 위해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마음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더 개인적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스스로 행하는 모든 것에서 나는 실패하고 죄를 지으며, 나의 가장 선한 의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는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모든 행위와 나의 모든 의 위에 "아나테마 마라나타(저주가 있을지어다,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써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에게 속해 있다면 나는 사탄에게 속한 것이요, 지옥과 영원한 파멸에 속한 것임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의 그 무엇 위에 집을 짓는다면 나는 멸망할 것이고 위로 없이 남겨질 것임을 배워야 합니다. 나의 온 삶은 전도자가 말한 "헛되고 헛되도다"가 될 것입니다. 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이 고백 속에 담긴 고통을 이해하십니까?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해야 했고, 나 자신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내 자신의 의를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스스로 쌓아 올린 바벨탑이 무너져 내려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파선(shipwrecked) 당해야 했습니다. 나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비참하고 잃어버린 죄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 고백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공 상태에서 보배로운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원치 않고, 구주를 원치 않으며, 이 유일한 위로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충분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예(Fraanje) 목사는 "낙원에서 쫓겨나는 문 위에는 ‘독립(independent)’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것입니다. 이 고백의 위대한 위로와 영광을 발견한 유일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괴로워 본 적이 있습니까? 회중 여러분, 정직해지십시오.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죄인이 되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음, 예수님의 위로는 참 놀랍게 들리네요. 하지만 내 자신 안에서도 어느 정도 위로를 찾고 예수님 안에서도 위로를 찾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친구여. 진짜 예수님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상상해낸 구주라면 가능할지 모르나, 그런 가짜 구주는 여러분을 지옥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진짜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부가 되시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십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모든 위로를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죄 때문에, 여러분의 기도 때문에, 여러분의 의로움 때문에, 여러분의 교회 예배 때문에, 여러분의 존재 자체 때문에, 여러분의 모든 생각과 동기와 말과 행동 때문에 완전히 ‘불편(uncomfortable)’해져 본 적이 있습니까? "나의 온 삶이 나를 거룩한 불편함으로 몰아넣습니다. 나는 내 존재의 모든 것에 불만족합니다"라고 말해야만 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 편안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에 대해 편안할 수는 없습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와 예수님의 의를 동시에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고백입니다.
셋째로, 체험적으로 이 고백은 단순하고 심오하며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영광스럽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엎드려 "주님, 제가 하는 일이나 생각이나 제 존재 자체에는 아무런 위로가 없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죄악됩니다.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하는 비참한 죄인에게 이것은 영광스러운 고백입니다. 오,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불편해하며 불의함 가운데 만왕의 왕 앞에 자신을 던지는 죄인에게는 영광스러운 위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모든 딜레마와 불편함과 죄악과 불의에 대한 해답으로 계시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로 설 것인가를 두고 씨름하는 죄인에게,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뿐임을 영혼에 열어 보여주시고 죄인을 끝까지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기꺼움을 보여주실 때, 그의 영혼에 살아있는 소망이 솟아납니다.
그는 자신의 죄악의 바다에서 파선할 때, 주 예수님께서 그를 건져내어 그분의 만족케 하시는 피의 바다에 담가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경험합니다. 오, 그때 그 죄인이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예수님과 구원적으로 연합되었으며, 거저 주시는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예수님의 의가 자신에게 전가(imputed)되고 성령에 의해 인 쳐졌음을 믿을 때, 거기 영광스러운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나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고,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때 그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세상이 정의하는 얕은 의미의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빚어진 그리스도인입니다. 믿는 죄인은 그때 영광스럽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나의 생명을 발견합니다. 그분 안에서 나의 의를 발견합니다. 그분 안에서 나의 위로를 발견합니다. 그분 안에서 나의 기대를 발견합니다. 그분 안에서 나의 전부를 발견합니다. 그분은 천하 사람 중에 만민에게 주신 이름 중 내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할 유일한 이름입니다."
오, 성령께서 은혜로운 믿음으로 그 파선당한 영혼에게 그의 빚 계좌가 다른 분,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고 그분과 함께 청산되었으며, 그가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다른 분의 의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실 때 그 얼마나 큰 복입니까! 죄인은 그때 자신의 불의함이라는 고통 한가운데서 결코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영광스러운 고백이 영혼 속에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적고 그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주 작을지라도, 그 죄인은 여전히 그분을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그는 리브가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고 그분의 장신구 몇 개만 가졌을지라도, 비록 언젠가 보게 될 그 모습 그대로 본 적은 없을지라도, 나는 이분을 따라가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시며,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하셨고, 신적 선지자로서 그분의 백성의 교사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중보하시는 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인도하시는 왕으로서 그들을 다스리시며, 그분의 피의 능력으로 마귀의 권세에서 그들을 건져내시는 이 신인(God-Man)을 나는 따라가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의 날에 백성들을 기꺼이 헌신하게 만드십니다.
회중 여러분, 오늘 사랑 안에서 여러분께 묻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유일한 위로입니까? 여러분은 복음의 능력과 위로를 맛보기 위해 무력해지고 위로를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진리로 인해 너무나 기뻐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가 이 구절을 남용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명제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사는 모든 것이 세상, 세상, 세상뿐이라고 두려워하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요한복음 3장 16절이 하나님께서 ‘택함받은’ 세상을 사랑하셨다거나 하나님께서 ‘거룩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회중 여러분, 더 이상 자신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가르침 받은 그 백성들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 모두에서 최상의 것을 소유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최상의 것, 곧 유일한 위로이자 값진 진주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다가올 세상에서도 최상의 것, 곧 값진 진주를 가질 것입니다. 오, 이것은 영광스러운 고백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죄인이여, 가련한 죄인이여, 당신은 이분을 따라가겠습니까? 당신의 위로를 어디서 찾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 생각을 여러분께 남깁니다. 이것은 영원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어두워질 수도 있고, 섭리의 구름 뒤에 숨겨지거나 죄의 잔해 아래 묻힐 수도 있지만,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다가올 세상에서도 말입니다. 오, 회중 여러분, 이 위로는 견고한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성부의 주권적인 즐거움과 성자의 피로 사심, 그리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영향력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음 시간에 이 질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 내용을 듣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회중 여러분, 이 위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생토록 잘 견디게 해 줄 것이며, 그들은 결코 이 위로에 실증 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요. 그들이 너무 나태하거나 차가워질 수 있고, 자신의 완악함을 한탄할 수도 있지만, 천하 사람 중에 만민에게 주신 이름 중 우리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할 그 유일한 이름에 대해서는 결코 실증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을 매주 하나님의 성소로 이끄는 힘입니다. 형식이나 관습이 아니라, 그 이름을 다시 듣고 싶어 하는 갈망, 그 달콤함을 맛보고, 그 위로를 알며,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라는 이 영광스러운 평생의 고백 속으로 더욱 깊이 인도받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 우리는 거저 주시는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요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들입니다. 아멘.
시편 찬송 202: 전 곡